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공군 ==== 육군의 열약한 사정에 가려져서 그렇지 공군의 경우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 [[최용덕]] 장군과 [[김정렬(1917)|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해서 약 2000명의 병력으로 공군을 편성했지만 전투기, 폭격기, 공격기 같은 전투임무의 항공기는 '''단 1대도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는 훈련기 1대가 있었고 훈련기에는 기총이 달려있어서 전투임무를 충분히 수행 가능했다는 점에서 임정 시절보다도 퇴보한 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병옥 박사나 주한 미 대사를 통해 100대 가량의 전투기, 폭격기, 연습기, 수송기 등을 요청했지만 역시 북침의 우려로 거부당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전투기를 지원해준다 해도 그걸 유지할 유지비를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게 이유였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국 공군에게는 전투에 쓸 항공기는 일절 원조하지 않았다. 미군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육군 항공대를 공군으로 독립시킨 상황에서 김정렬 총장이 공군을 창설했던 것도 미 고문단의 완강한 반대를 뚫고 간신히 성사시킨 것이라 그 이상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공군이 보유한 건 L-4, L-5 연락기와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T-6 텍산]] 연습기가 종합 22대, 일본이 버리고 간 연습기 Ki-9 몇대 정도다. 일본 항공기는 사진자료 외에 특별한 기록이 남은 게 없지만 미군이 쓸만한 항공기는 다 가져가 해체하거나 표적 연습 등으로 처분했고 한국 공군이 손에 넣은 건 성능이 떨어지는 극소수의 연습기밖에 없었다. L-4 연락기는 일부만 철로 만들어졌고 대부분이 캔버스천과 나무로 만들어진 항공기로 미국이 한국군에 최초로 제공한 항공기다. 하지만 무장을 달 수도 없고 연락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전기도 없었다. 항속거리도 320km 정도라 작전반경도 짧았다. 더군다나 제공된 수량도 10기 뿐이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항공기 원조 요청을 해 L-5 연락기 10기를 추가로 지원받았는데 항속거리가 600km가 넘고 이번에는 무전기가 있어서 L-4 연락기보다는 낫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L-4 연락기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뿐 여전히 무장을 달 수 없고 방어력도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공비토벌 작전이나 북한과의 소규모 충돌에서 항공기를 잃기도 했고 2대가 [[월북]]해버려서 개전 시점에 이 연락기들의 숫자는 두 기종을 합쳐 12대만 남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공군의 꽃인 전투기와 폭격기를 계속해서 요청했지만 미국은 계속 거부했다. 김포 비행장에서 퇴역해서 처분하려던 [[B-26]] 머로더 폭격기 30대를 처분하지 말고 넘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호전적인 성격의 이승만이 폭격기들로 북진을 해버릴 것을 우려한 미국 측은 이걸 넘겨주지 않는다로 일축하고 비행기를 '''[[도끼]]로 파괴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원조가 안된다면 구매를 하자는 의견을 내놓고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모금을 벌여 총 3억 5천만원이 모금됐다. 당시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되는걸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 돈으로 전투기를 구매하려 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하자 결국 민간업체를 통해서 캐나다에서 구매한 항공기가 [[T-6 텍산]] 연습기 10대다. 금속으로 제작된 이 항공기는 최고속도가 300km가 넘고 항속거리 또한 1,200km가 넘었다. 이 항공기들은 각자 다른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월북을 막기 위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종사 10명에게 맡겼다. 추가로 M2 기관총 20정, 탄약 5,000발, 1년치 부속품과 항공유도 구매했다. 개조를 하면 기관총과 폭탄도 장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제 [[Yak-9]] 프로펠러 전투기를 장비한 북한군 공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